한국의 추상시인, 그가 걸어간 추상의 여정을 따라서 안녕하세요!
금요일의 칼럼 한입입니다🙆♀️
칼럼은 격주 금요일에 발송되며,
현대미술 거장들이 현재의 위치까지 오기 위해 겪은
필치, 화풍, 심경의 변화와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깊이 다뤄보는 컨텐츠입니다 :D
칼럼이 발행되지 않는 주는 기존의 '전시 추천' 컨텐츠가 발행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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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 작가는 한국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입니다.
한국의 전통에 서양의 추상회화를 접목시켜, 선명한 한국적 정취에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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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미와 색감을 더해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탄생시켰습니다. 그의 작품은 보는 이들을 명상의 세계로 이끌며 전통을 세련되게 현대화하여, 민족 정서와 자연을 우려낸 하나의 ‘조형 시詩’를 창조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김환기 작가 작품의 본질은 전통과 자연입니다.
산과 달, 구름, 새, 매화, 백자 등 우리나라의 자연물을 통해 한국인의 정체성과 민족 의식을 그리며, 구상에서 추상으로, 추상의 정점에서 점화(點畵)로 변모해나갔습니다.
누구보다 서양 미술을 풍부하게 접했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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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정신을 계승하여 예술을 통해 자연으로 회귀하고자 했던 한국의 추상시인, 수화樹話 김환기.
오늘은 그가 걸어간 추상의 발자취를 따라가보려 합니다.
*수화(樹話) : 나무와 대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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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는 1913년 전라남도 신안군 기좌도에서 태어나, 조그만 섬마을에서 자라며 푸른 바다와 깊고 넓은 밤하늘과 늘 함께했습니다. 아버지가 섬의 유지여서 집안이 부유했고, 미술에도 재능이 있어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며 작가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김환기 작가는 일생에 걸쳐 여러 번 화풍이 변하는 와중에도 일관되게 고향의 하늘과 바다를 연상시키는 서정적인 그림들 그렸습니다. 그에게 소년기의 섬 풍경은 정체성이자 상징인 서정 시詩의 출발점입니다.
김환기 작가의 작품은 시기와 장소에 따라 크게 세 구간으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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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학 기간은 김환기 작가가 본격적으로 미술에 입문하며 서구 미술사조를 접하고 추상미술에 눈을 뜬 시기입니다. 일본 화단 내에서도 전위적인 미술단체였던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추상을 공부했습니다. 해당 시기에는 서양 양식을 받아들이면서도 민족의 정체성은 놓지 않아, 실험적인 표현주의와 함께 작품의 제목이나 모티브들에서는 여전히 한국적 정서를 읽을 수 있습니다.
<집>은 현재 남아있는 김환기 작가의 작품 중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고향의 전통 가옥을 떠올리며 한옥의 특징인 장지문, 돌담, 솟을대문, 댓돌 등을 기하학적 형태로 단순화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선 계단이나 물에 비친 모습을 초현실주의적으로 과감하게 표현하여, 이 때부터 동서양의 여러 요소를 조화롭게 융화시키는데 뛰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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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환기는 친우들과 추상미술 단체를 결성하고 예술인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다방면의 문학적 소양을 다집니다.
삽화를 그리거나, 수필‧비평글을 발표하고, 골동품과 서화를 수집하며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깊은 관심을 키워나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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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게 됩니다.
그는 전시의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도 해군 종군 화가로 일하며 창작열과 예술혼을 불태워 신문과 잡지에 글을 기고하고, 피난지 풍경, 판잣집 등 피난의 일상들을 계속해서 작품으로 남겼습니다.
이는 전쟁의 아픔을 표현하기 위한 것 보단, 오히려 담담한 시선으로 전쟁 속에서도 이어지는 소소한 일상을 통해, 고통을 묵묵히 이겨내는 민중의 삶을 그린 것 입니다.
도쿄~서울 시기의 화풍은 초기의 반추상의 기하학적이고 간결한 선에서 점차 두터운 마티에르의 산, 달, 백자, 매화같은 한국의 문인화를 연상시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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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자연물과 정물 소재들로 변화합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을 통해 민족적 정서를 계속해서 담고자 했던 그의 노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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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는 항상 미술의 중심지인 파리에 대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불혹의 나이에 교수직을 휴직하고 한국에서 쌓은 모든 것들을 뒤로 하며 프랑스로 떠나게 됩니다. 이러한 결심을 하는 데에는 큰 용기가 필요할 수 밖에 없는데, 늘 더 큰 무대로 나가고자 했던 갈망과 의지로 먼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타지에서의 삶은 그에게 전통적 조형미와 색감에 대한 애정을 더욱 각별하게 해줬습니다.
산과 달, 사슴, 매화, 그리고 달항아리는 이 시기의 작업에서 주로 등장하는 소재로, 한국의 자연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조형요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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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는 일찍이 한국 고미술에 대한 수집열이 대단했는데, 소장품 중에서도 가장 사랑한 것은 품에 넘치도록 크고 둥근 달항아리였습니다.
그는 때때로 볕이 좋은 날이면 항아리들을 마당에 내어 초석 위에 올려놓고 감상하며 기물 그 이상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귀하게 여겼습니다. ('달 뜬다'는 표현을 사용하며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합니다) 전쟁이 터져 피난을 떠나는 와중에도 달항아리들을 데리고 가지 못해 눈물을 흘리기도 했는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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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항아리라고 불리는 조선백자 항아리는 본래 절제와 지조, 규범을 중요시하던 당대 지성인들의 격조와 품위를 가장 잘 반영하는 조형물입니다.
김환기는 문명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자연과, 그 반영물인 백자 항아리의 담백하고 무심한 듯 절제된 아름다움을 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습니다. 흙과 유약의 오묘한 조화로 빚어진 부드럽고 미묘한 빛깔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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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형태는 현존하는 미적 가치 중 으뜸이라 칭하며 작품의 소재로도 적극 표출하였습니다.
실제로 '달항아리'라는 이름을 제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이 김환기 작가라는 말이 있는데요!
이전까지는 단순히 백자원호(白磁圓壺) 또는 백자대호(白磁大壺)로 불리던 항아리가,
김환기 작가가 애정을 담아 ‘달항아리’란 이름을 붙여주면서 용어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김환기 작가가 달항아리와 함께 즐겨 그렸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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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는 한국의 자연물인 산봉우리와 우거진 숲, 둥근 일월, 일렁이는 구름, 흘러가는 강과 바다 등의 산월풍경입니다. 작가가 이렇게 자연을 그린데에는 순환의 이치와 기운생동의 동양적 철학이 담겨있습니다.
단색조의 바탕 위에 절제된 형태로 구현된 산월과 함께, 공통적으로 푸른 청색이 나타납니다. 그의 청색은 만물이 생성하는 장으로, ‘생명의 흔적이 담긴 색’입니다. 작가는 이 때문에 자신의 청색은 서양의 블루와는 다르다고 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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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김환기는 50년대에 이미 그만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는 담백한 청색 주조 화면, 평면적 구성, 두터운 마티에르 등의 특징을 정립해나갔습니다.
파리에서 김환기는 극찬을 받으며 여러 번의 성공적인 전시를 개최했고, 수많은 걸작들을 발표하며 성공적인 성과를 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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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김환기는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여 회화부분 명예상을 수상합니다. 이 경험은 수상의 기쁨 이상으로 그의 작업 세계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는데요. 원래 줄곧 그가 동경하던 곳은 파리였지만, 점점 기운이 없어지는 유럽의 회화들과 반면 힘이 넘치는 미국의 추상주의 그림들을 보며, 미술의 새로운 중심지로 미국이 떠오르고 있다고 생각하여 다시 모든 것들을 버리고 뉴욕행을 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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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unds of Spring 4-I-196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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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는 민족적 색채에서 발전하여 보다 보편적이고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회화를 그립니다. 기존의 구상성을 덜어내고 본질에 파고들며 점, 선, 면, 색 등 순수한 조형적 요소에 집중했습니다.
김환기 작품의 주요한 조형 요소인 ‘점’이 바로 이 시기에 발전한 것인데요. 그의 추상은 처음엔 점에서 시작하여 점차 기하학적 색면으로 넘어갑니다. 이 비정형의 색면은 자연이 변형된 형태로 산, 구름, 달 등의 형태가 해체된 것으로 해석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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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으는 점, 점들이 모여 형태를 상징하는 그런 것들을 시도하다.”
-1968년 1월 23일 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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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를 심화시켜 전면점화(全面點畵)라고 불리는 명상적 추상의 세계를 탄생시킵니다.
김환기의 추상점화는 캔버스에 유화라는 서양의 재료와 기법을 사용하면서도, 수묵화처럼 번지고 스며드는 효과를 내어 동양적 정서를 더한 신선함으로 세계에 한국의 추상미술을 알리는 계기가 됩니다.
뉴욕 시기의 작품은 형상이 남아있는 70년대 이전과, 점과 선만이 존재하는 완전한 추상인 70년대 이후로 나눌 수 있습니다. 특히 70년 이후부터 타계한 74년까지의 작품들은 작가의 활동에서 절정에 이른 시기로 평가받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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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의 ‘전면점화’는 작가가 나고 자란 기좌도의 넓고 아득한 바다와 하늘의 별들을 닮았습니다.
점을 반복해서 찍어 선이 되고, 그것이 모여 면이 되어 무한히 확장하는 우주가 됩니다. 점들은 화면에서 번지고 얼룩지며 풍부하고 다양한 짜임과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각각의 점들은 부드럽게 이어지는 테두리로 감싸여 있으며, 마치 별처럼 하나하나 광채를 품고 있어 이들이 모이면 마치 거대한 우주를 표현하는 듯한 기운을 내뿜습니다. 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화면이 살아 숨쉬는 듯한 생명감과 신비로움을 느끼게 합니다.
김환기는 항상 고향의 하늘을 떠올리며 자유와 행복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그가 그려낸 점들은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의 불빛들을 바라보며, 고향을 생각하고 가족과 친구들을 그리워한 흔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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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점 하나하나에 그가 만난 인연과 자연, 음악 등 살아온 시간을 새겨 넣었습니다. 여기에 셀루리안 블루, 울트라마린, 프러시안 블루, 로즈 레드, 로즈 매더 등의 깊고 신비한 색감을 사용하여 머나먼 이국땅에서 겪은 오만가지 희노애락을 표현했습니다.
“친구들, 그것도 죽어버린 친구들,
또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친구들을 생각하며 점을 찍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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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점들은, 하늘의 별 이자, 땅의 사람이며, 사람은 다시 별이 되는 거대한 순환으로, 천지인 합일의 동양적 사상을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우주적 윤회와, 시공을 초월하는 무한의 세계가 담겨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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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너무 많은 이들을 그리워해서인지, 아침부터 밤까지 점을 찍어 내렸고,
매일 10시간 이상 수그린 자세로 진행 된 점화 작업은 결국 그에게 목 디스크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리고 디스크를 수술하는 과정에서 수술이 뇌출혈로 이어지며 결국 그도 하늘의 한 점의 별이 되었습니다.
동양의 직관에 서양의 논리를 결합해,
전통과 현대를 겸비한 작품으로 한국의 추상을 널리 알렸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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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미술의 선구자이자 서정 시인,
달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별을 빼곡히 수놓은 화가.
그가 그려낸 푸른 빛의 우주를 함께 감상해보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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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양 사람이요, 한국 사람이다.
내 그림은 동양 사람의 그림이요. 철두철미 한국 사람의 그림일 수밖에 없다.
세계적이려면 가장 민족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우리나라를 떠나 봄으로써 더 많은 우리나라를 알았고
그것을 표현했으며, 또 생각했다.
<편편상 중> 사사계, 1961년 9월호 - 김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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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 전라남도 신안군 출생 1933, 니혼대학 미술부 입학 1936 첫 개인전, 도쿄 아마기화랑 1946~1950, 서울대학교 서양화과 교수 역임 1952~1963, 홍익대학교 교수, 학장 역임 1963, 제2대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역임 1963, 상파울루비엔날레 회화부분 명예상 1970, 한국일보 <한국미술대상> 대상 1970, 국립현대미술관 경복궁미술관, 서울 1974, 뉴욕에서 별세(향년 6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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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를 소개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그의 아내인 김향안입니다.
김향안. 본명은 변동림.
시인 이상, 화가 김환기, 두 천재가 사랑했던 여인입니다.
변동림은 이상과 김환기의 천재성을 남들보다 일찍 알아보고 이들의 예술세계를 이끌어주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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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 국어에 능통하여 이화여대와 소르본에서 수학할 정도로 천재적이었고, 그 스스로도 수필가, 평론가, 화가로 활동했습니다.
이화여대 수학 시절, ‘우리 같이 죽을까, 어디 먼데 갈까’ 라는 드라마의 한 장면 같은 고백으로 이상과 결혼하게 되었지만, 혼인 4개월 만에 이상은 폐병을 얻어 타지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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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후, 당시에 무명화가이자 딸 셋을 둔 이혼남이었던 화가 김환기가 연서를 보내왔고, 서신을 주고받으며 마음을 키웠으나 집안에서는 자식이 있는 남자와의 결혼을 반대합니다.
여기서 변동림은 ‘직접 낳아야만 자식인가. 몇이든 거둬 키우겠다’는 담대한 답변과 함께 집안과 연을 끊고 본명도 버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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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김환기의 성과 아호(어릴적 호)를 달라하여 김향안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태어납니다.
* 향안은 고향의 언덕이라는 뜻입니다.
김환기가 프랑스로 떠날 때, 김향안은 그 보다 먼저 파리로 향해 거주지와 김환기의 아틀리에, 전시장 등을 마련해두었고 이주 후에도 여러가지 일을 하며 김환기가 작업에 몰두할 수 있게 도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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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뉴욕으로 이주한지 20년 만에, 두번째 이별이 찾아옵니다.
185cm의 훤칠한 키와 긴 목의 소유자였던 김환기는, 이러한 신체적 조건이 오히려 화가로썬 독이 되어, 남들보다 목과 허리를 더욱 굽힌 채 작업을 해야했고 이것이 결국 디스크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남편을 묻은 향안은 슬퍼할 새도 없이 김환기의 작품을 모아 정리하여 환기재단을 설립했으며, 한국으로 돌아와 환기미술관을 건설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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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사설 개인 미술관으로는 국내 최초라는 의미가 있었고, 이후에도 김향안은 김환기의 예술을 후대에 알리기 위해 계속해서 힘썼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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